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사실

한 발자국 씩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좋은 의미가 결코 아닐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죽음은 사실 '자유'와 '해방'의 시작점이 된다.

마치 보자기로 옷가지를 동여매어 정리하는 것 처럼

한 명의 인간에게 허락된 지상에서의 모든 삶이

모여서 하나의 봇짐 처럼 동여매어진다.

그 사람이 살아간 모든 발자국들이 정리된다.

어떤 발자국은 얕게 파여있고

어떤 발자국은 깊고 묵직하게 남아있다.

어떤 발자국은 기우뚱하게 남아있고

넘어지고 미끄러진 발자국들도 여기 저기 남겨져있다.

천천히 걸어간 발자국도

전력질주한 발자국도 모아져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이제 차곡차곡 모아지고 정리되어지고

새로운 몸뚱이의 새로운 생명(Living Sprit)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 날이

약속되어 있다.


우리 신앙인은 그 날을 소망하며

매일 하루만큼 씩의 발자국을 찍어간다.

끝이지만 참 시작인 그 지점을 향해 삶의 시간들은

쉬지도 멈추지도 않고 전진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시간에

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십자가로 이겨내신 그 분과

참으로 마주 서는 그 미래의 날을 소망으로 기억한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미래를 기억하며 소망하며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삶의 시간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죽음의 날 그 넘어에 있는 그 날을 소망하고 기억한다.


하루의 서글품과 우울함.

하루의 절망과 답답함.

하루의 분노와 어리석음.

하루의 시련과 고난.

우리가 세상의 바닥에 찍어낸 하루 만큼의 발자국 뒤에는

그 하루만큼의 삶이 그 시간의 모습 그대로 남겨져있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이미 지나와버린 내 삶의 모습들을

경건하게 마주하고 기억해야 한다.

내가 지나보낸 그 어리석은 날들을 민낯으로 들여다 보아야한다.

내가 지나보낸 그 하루의 시간만큼 내 삶은 줄어들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동시에 그 하루의 시간만큼 약속된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기억해야만한다.

그래서 처절한 반성과 간절한 소망이 공존하며

그 반성과 소망의 가장 깊은 그 바닥에는

기름부움을 받은 자 예수의 피 흘림이 있음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만한다.

내 속의 가장 깊은 그 곳에서

썩고 썩고 더 이상 썩을 것이 없는 흉물스러운 내 내면의 심처에서

그 바닥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한다.


그 질척이는 악취 덩어리의 늪이 되어버린 바닥을 맨발을 딛고 만지고 끌어 안고 쓰다듬으며

괜찮다 괜찮다

너는 깨끗하다고 말씀하시는 그 두 눈을

휑하니 뚫려버린 손을 들어 나를 향해 내주시는 그 손길을

우리는 매일 만나야만한다.


우리 신앙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이다.

아무런 자격 없는 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의 유산을 물려 받아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고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의 입술로 고백한다.

나의 하루는 그저 별 의미 없이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나무에 달리신, 그렇게 피 흘리신

그렇게 절실히 살리고자 하는 그 인간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으신

그 분이 물려주신 이름을 나는

제발 기억하고 기억하여 하루를 살아가야만 한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나여!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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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개체이며 개체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은 군집을 이루어 삶을 살아간다.


군집 속에 속한 사회적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만, 사회 속에서의 인간도 결국 개체일 수 밖에 없다.


자기 자신 외의 인간은 타자일 뿐이다.


자신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타자들이 존재하지만,


그 영향을 받아 자의적으로 수용하든 거부하든


아니면 강제적으로 수용하든 거부하든


아니면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중에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받게 되거나


인간 그 스스로는 결국 개체이다.



개체이며 개체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이 아닌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비 논리적이며 비 이성적인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인 인간이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이를 해석하려 시도해보면


결국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개체인 인간이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군집을 이루는 것이 훨신 유리하며,


각 개체인 인간이 서로 생존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타자를 확보하기 위한 진화적 선택으로서 특정 호르몬 작용에 의한 '사랑'이라는 형태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이다.


생물학적 상속 관계인 두 개체간의 관계에서는 좀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면서까지 생물학적 상속자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행동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개체로서의 생존이 이유가 아니며, '종족 보존'을 위한 진화적 선택의 결과로서 형성된 행동 양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진화론의 기본 전제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이러한 해석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개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함이나 '종족의 보존'을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의 사랑의 형태도 매우 빈번하게 발견 된다는 사실로 비판 가능해 보인다.


여기에 에고/수퍼 에고와 같은 정신분석학적 요인이나 집단 최면, 학습 효과와 같은 요인을 끌어들여 설명하려 시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


그러한 요인들을 이용하여 설명한다면 결국 생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추론 과정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며, 그 예외의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예외를 인정하며, 진화론적 관점에서 진화론적 선택이 항상 '최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보여지는 '선택'으로 흐르지 않다는 다는 점을 들어 인간 진화론적 선택이 '생존'이나 '종족 보존'에 유리한 것이 아닌 불리한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 되며, 현재의 인간이 보여주는 '사랑'이라는 행위 양상이 '생존'이나 '종족 보존'을 위해 선택 되었다라는 추론 자체의 타당성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인간이 개체이며 개체일 수 밖에 없다는 전제를 부정한다면 모든 이야기가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개체이며 개체일 수 밖에 없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개체인 인간이 개체로서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으며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 비슷한 용어로 박애의 경우도 매우 놀라우며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


사람은 현재 당연하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인지하며, 심지어 합리적인 것이라고 인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조금만 돌아보고 고찰해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것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사랑은 기적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사랑. 그것은 매우 놀랍고도 신비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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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직 (Only)
     - 신명기 6:4를 묵상하며

나의 하루를 살아가는 시간 동안
조금은 하나님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가능한 많이 하나님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하루를 가득 나를 생각합니다.

내 속의 분주함을 하나씩 때어 밀어 놓고
그 곳에 당신을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내 속의 다른 공상을 조금씩 걷어 내고
그 곳에 당신을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갈등하게 하고 실망하게 하는 짐들을
당신 앞에 벗어내고
그 곳을 당신을 향한 생각으로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하루를 가득
나를 생각하고
나를 바라보며 나를 듣습니다.

당신은 유일하게 하루를 가득 나를 생각하시는 하나님
오직 유일하신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개역개정]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단 한 분밖에 없는 여호와이십니다.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들으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뿐이신 여호와시오. [쉬운성경]

Here,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KJV]

Here,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NIV]

Here, O Israel! The LORD is our God, the LORD is one! [NASB]

Listen, O Israel! The LORD is our God, the LORD alone. [NLT]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나 아도나이 에핫 [히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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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을 살펴 보면 Nous는 보통 '마음'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마음'이라는 해석만으로는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많다.

월터 바우어 렉시콘에 의하면 Nous의 첫 번째 의미는 지적인 인지(혹은 지적인 이해) 능력을 뜻한다고 설명되어있다. 두 번째 의미는 사고하는 방법(혹은 사고하는 태도)이며, 세 번째 의미는 사고의 결과(혹은 의견)이다. Nous는 감성적인 역할로서의 마음보다 이성적인 역할로서의 마음에 보다 많은 비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렉시콘에 근거하면 Nous는 '마음'이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이성'이라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분명히 조심해야 할 것이 극단적인 해석이다. 감성적인 부분을 100% 모두 제거한 순수한 '이성'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이성'이 '감성'에게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는 냉철하게 기계적인(=논리적인) 사고 활동을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100%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사고할 수는 없다. 인간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에로부터의 영향도 있으며 그 당시의 감성정 분위기도 사고 활동의 결과에 매우 많은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Nous를 해석할 때는 인간 마음에 있어서 '이성적 사고 활동'이라는 그 자체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되, 부분으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아닌 통전적인 관점으로의 인간의 마음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해석해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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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헬라어] Nous에 대한 고찰  (0) 2011.05.22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기록되어있다사람들이 흔히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신명기에 들어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내용을 읽다 보면 마음이 매우 무거워지거나 착잡해질 때가 있다어떤 내용들을 엄격하다 못해 잔인하다고 느껴지기조차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서운 분이신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 왜 이런 내용이 성경에 존재하는 것일까하나님은 이렇게 다가서기 어려운 분이신 걸까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엄격하고 굳은 표정의 얼굴을 가지신 분일까?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어떤 내용들인지 보다 깊이 알려면 먼저 신명기가 어떤 성경인지를 알아야 한다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이집트)에서의 긴 노예생활 속에서 극적으로 빠져 나온다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민족 대 이동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되고, 40년의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가나안 땅의 입구에 도착한다. 40년 동안이나 마음 속에 품어 왔던 희망과 기대가 드디어 그들의 눈 앞에 현실로서 펼쳐진 엄청난 사건이다그 약속의 땅희망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너무도 말씀하시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이제 곧 그들은 지금까지 척박한 광야에서 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셔야만 했던 말씀들바로 그것이 신명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들이 지나온 광야와 같은 불모지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문화와 종교였다. 먼저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종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이집트)에서 나온지 40년이 지나긴 했지만, 그 곳에서 살았던 시간이 훨씬 길다. 외국으로 이민간 교포를 생각해 보자. 그들의 2세를 보면 한국문화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문화가 혼합된 형태를 보여준다. 3세를 보면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 거기에서 한 세대 더 내려가서 4세를 보자. 그들은 이미 뼈 속까지 그 나라의 문화가 배어 있는 그 나라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미 뼈 속까지 애굽인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태양, 강과 같은 자연을 신으로 섬기며 심지어 짐승이나 곤충들 까지도 신으로 섬기던 그들의 종교적 가치관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자세히 알려주셔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이 들어가야 하는 가나안 땅의 민속 종교와 문화는 매우 처참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을 위한 제사는 음란의 수준을 넘어선 입에 담기 힘든 그런 모습이었다. 여사제 들은 집단 성 행위를 위해 존재 했었고, 자신들의 신에게 바쳐지는 제사의 최고 정점에서 광적인 집단 성 행위가 자행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가치관으로 형성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민족이 교제하기 시작한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 다는 것이 무엇인지, 즉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선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세히 알려주시길 원하셨다. 또한, 애굽이나 가나안의 신을 섬기는 추악한 모습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도 알려 주시길 원하셨다. 바로 이것이 신명기의 내용이며 목적이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찌니라’. (신명기 22장 4절)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특별히 잘 알 수 있는 것이 22 4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단순히 이웃을 도우라고 말씀하신 것에 머물지 않으시고 이해하기 쉽도록 아주 명확한 예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작고 사소한 일일 지라도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도우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도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반드시도우라고 말씀하신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던 도중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어르신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분을 돕던지, 돕지 않고 그냥 지나가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성경은 반드시도우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것이 단순히 행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이런 도움은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도우라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 중심, 마음으로 도우라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실제로 몸을 움직여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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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형제를 도우라 (신22:4)  (0) 2010.12.10

사진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kiyomi-and-the-gang/220391293/

요즘 오후 3-4만 되면 머리가 아파왔다.
분명히 심한 두통은 아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멍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

마치, 밤에 1시간 정도만 잠을 자고 일어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무언가 머리 속에 스펀지 같은 것이 가득차서 생각하는 속도가 매우 느려지는 듯한 느낌이다.
머리가 아픈 통증으로 인해 불편하기 보다, 답답함으로 인해 불편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다.
적지 않은 수의 현대인들이 격고 있는 만성 두통이라는 이름이 붙은 녀석이 그런대로 나의 증상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이 만성 두통이라는 녀석의 정체가 참 오묘, 아니 모호 했다.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는 일을 하거나, 커피를 장기간 지속적으로 복용하거나, 식생활이 불규칙 하거나, 일하는 환경이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을 수 없거나, 불면증이 있거나 등이 원인이란다.

결국, 이 만성 두통이라는 녀석과 헤어질려면 규칙적인 식상활을 하고,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아야 하며, 가급적 신경을 덜 써야만 하고, 잠을 충분히 자야 하며, 커피를 복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녀석이 원인인지 알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단 한 놈씩 찍어서 쿡 찔러 보는 수 밖에...

그래서,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열심히, 그리고 매우 성실히 동반 생활을 해왔던 커피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이제, 허브티라는 분과 생활을 해 볼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로 괜찮다는 허브티를 살펴보니 꽤 값이 나가신다.
거기에 더하여 종류도 다양하다.
일단, 로즈마리, 페퍼민트 쪽으로 시작해 보려 한다.

그런데, 허브티를 마실려고 생각해 보니 컵(cup)도 바꿔야 어울릴 것 같다.
현재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사용하고 있는 텀블러는 허브티와는 너무 안 아울리는 것 같다.
왠지 투명한 유리 컵에 따라서 마셔줘야만 할 것 같다.

아무튼, 지금은 어떤 허브티를 Try 해 볼지 결정해야 겠다.
일단은 로네펠트나 베티나르디의 허버티를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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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랑방 내에서 트윗을 이용해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트윗 계정을 만들었다.

휴대폰에 트윗 프로그램도 설치하고 잘 보이는지 확인도 끝냈다.

그런데, 트윗 아이디 만드는게 간단치가 않다.

원래 내가 사용하던 아이디는 이미 존재한다.

인터넷 세계에서 아이디라는 것이 그리 의미가 적지는 않다.

아이디라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매게체의 역할을 한다.

여하튼, 오늘 부로 트윗질 시작이다.

아! 중요한걸 까먹을뻔 했다.

나의 트윗 계정은 @tonAmartolo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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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www.flickr.com/photos/24068543@N00/4354654006/




예전에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요즘 다시 문득 문득 나의 머리 속으로

침투하여온다.

 

결국 문제들의 원인 '' 자신에게 있었다.

난데 없는 같지만, 것이 결론이다.

결국은 '' 원인이다.

 

나는 한참 동안을 하나님께 묻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마음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너무 당돌하고 주제 넘는 물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대답을 주셨다.

' 아내를 많이 사랑하거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의미를 아주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 시간들을 지나 보내기만 했다.

 

지금 다시 때의 음성이 들려온다.

사랑하거라는 음성이.

 

내가 먼저 노력해야 한다.

아니, 노력해야만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정이란 것을 만드신 보다 본질적인 이유의 하나이다.

''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모두를

많이 사랑해야 한다.

말하는 음성의 입술로, 경청함의 귀로, 먼저 일어서는 다리로,

먼저 깨어나는 아침으로, 먼저 살피는 눈으로,

그리고 모든 것들을 내어 놓을 마음을 가지도록

많이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을 하면 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다.

지식으로서가 아닌 삶으로서.

 

사랑하자.

사랑하자.

내가 먼저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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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unamin.tistory.com BlogIcon dunamin 2010.06.11 12:36 신고

    안녕하세요 ~ 지나다 들렀습니다. ^.^
    공감 만프로 되는 글 보고
    아~멘.. 이라 하고 갑니다..

딤전1:15의 끝 자락에서 바울은 "ων πρώτος ειμι εγώ"라는 말을 붙인다.

이 말이 빠져도 문맥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말을 그 곳에 반드시 적어야만 했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고백이자,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다. 또한, 그의 편지를 읽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이 본문에 대한 한글개역 번역은 참으로 부적절한 것 같다. '괴수'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ων πρώτος'라는 단어가 전달해 주는 이미지 보다 훨씬 약하다. 그저 좋지 못한 것이라는 수준의 이미지만을 전달해 준다. 롬7:24에서의 '곤고한 자'라는 바울의 탄식과 부르짖음이 귀에 들리지 않는가?

이 4 개의 단어로 바울은 적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은혜"이다. 그와 동시에 "은혜"에 앞서 전재 된 "타락"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안에서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하며, 성도가 추구해야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길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길인지를 보이고 있다.
그 속에는 '겸손'이 묻어나오며, 다른 성도들을 향한 '섬김'과 '희생'의 진한 향이 배어나온다.
그리고 그가 가진 절대적인 '희망'의 실체를 말하고 있다.
이 것은 분명한 '감사'와 '찬양'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내가 본 바울을 난 몹시도 설명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몹시도 설명하고 싶지않다. 그래서 감사하며 동시에 답답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εγώ ειμι ο πρώτος των αμαρτωλών."(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톤 하마르톨론)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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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 해가 지나가려 한다.

너무 정신 없이 - 제정신이 아닌 채로 - 살아 가고 있었던 듯 하다.
이제 정신을 좀 차려야 겠다.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도 절실히 x 100 정도의 파워로.

그건 그렇고, 지금은 기말고사 기간이다.
어제 시험은 그런대로 평균은 된거 같은데, 오늘은 그리 긍정적이지가 못하다.

무엇을 쓸려고 했는지 의도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일기라고 해 두자.

내가 현재 가진 미션mission은 현재 내게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해서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시각으로 바라 보았을 때 모든 일에 대해서 충실한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네 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1. 가장 영향이 적은 일을 버리거나,
2.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되는대로(닥치는대로) 하거나,
3. 일을 세부적인 단위로 나누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그에 따라 처리하거나(이 경우는 우선순위가 낮은 단위 작업은 결국 버려지게 된다),
4. 이성적인 시각이라는 관점을 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하지만, 위의 네 가지의 조건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왜냐하면 버릴 수 있는 일이 과연 있는가? 중요하지 않은 일이 과연 있는가? 라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선 순위를 떠나서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비추어 얼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가에 대한 평가도 빠져 있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과격하게도 "이성적인 시각이라는 관점"을 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충실해 해야 하며, 더군다나 매우 잘 해내야만 한다.

그건 그거고, 내가 지금 먼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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