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사실

한 발자국 씩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좋은 의미가 결코 아닐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죽음은 사실 '자유'와 '해방'의 시작점이 된다.

마치 보자기로 옷가지를 동여매어 정리하는 것 처럼

한 명의 인간에게 허락된 지상에서의 모든 삶이

모여서 하나의 봇짐 처럼 동여매어진다.

그 사람이 살아간 모든 발자국들이 정리된다.

어떤 발자국은 얕게 파여있고

어떤 발자국은 깊고 묵직하게 남아있다.

어떤 발자국은 기우뚱하게 남아있고

넘어지고 미끄러진 발자국들도 여기 저기 남겨져있다.

천천히 걸어간 발자국도

전력질주한 발자국도 모아져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이제 차곡차곡 모아지고 정리되어지고

새로운 몸뚱이의 새로운 생명(Living Sprit)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 날이

약속되어 있다.


우리 신앙인은 그 날을 소망하며

매일 하루만큼 씩의 발자국을 찍어간다.

끝이지만 참 시작인 그 지점을 향해 삶의 시간들은

쉬지도 멈추지도 않고 전진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시간에

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십자가로 이겨내신 그 분과

참으로 마주 서는 그 미래의 날을 소망으로 기억한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미래를 기억하며 소망하며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삶의 시간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죽음의 날 그 넘어에 있는 그 날을 소망하고 기억한다.


하루의 서글품과 우울함.

하루의 절망과 답답함.

하루의 분노와 어리석음.

하루의 시련과 고난.

우리가 세상의 바닥에 찍어낸 하루 만큼의 발자국 뒤에는

그 하루만큼의 삶이 그 시간의 모습 그대로 남겨져있다.


그렇기에 우리 신앙인은 이미 지나와버린 내 삶의 모습들을

경건하게 마주하고 기억해야 한다.

내가 지나보낸 그 어리석은 날들을 민낯으로 들여다 보아야한다.

내가 지나보낸 그 하루의 시간만큼 내 삶은 줄어들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동시에 그 하루의 시간만큼 약속된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기억해야만한다.

그래서 처절한 반성과 간절한 소망이 공존하며

그 반성과 소망의 가장 깊은 그 바닥에는

기름부움을 받은 자 예수의 피 흘림이 있음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만한다.

내 속의 가장 깊은 그 곳에서

썩고 썩고 더 이상 썩을 것이 없는 흉물스러운 내 내면의 심처에서

그 바닥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한다.


그 질척이는 악취 덩어리의 늪이 되어버린 바닥을 맨발을 딛고 만지고 끌어 안고 쓰다듬으며

괜찮다 괜찮다

너는 깨끗하다고 말씀하시는 그 두 눈을

휑하니 뚫려버린 손을 들어 나를 향해 내주시는 그 손길을

우리는 매일 만나야만한다.


우리 신앙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이다.

아무런 자격 없는 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의 유산을 물려 받아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고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의 입술로 고백한다.

나의 하루는 그저 별 의미 없이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나무에 달리신, 그렇게 피 흘리신

그렇게 절실히 살리고자 하는 그 인간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으신

그 분이 물려주신 이름을 나는

제발 기억하고 기억하여 하루를 살아가야만 한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나여!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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