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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사랑 - 하나님의 마음

반드시 형제를 도우라 (신22:4)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기록되어있다. 사람들이 흔히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신명기에 들어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내용을 읽다 보면 마음이 매우 무거워지거나 착잡해질 때가 있다. 어떤 내용들을 엄격하다 못해 잔인하다고 느껴지기조차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서운 분이신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 왜 이런 내용이 성경에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렇게 다가서기 어려운 분이신 걸까?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엄격하고 굳은 표정의 얼굴을 가지신 분일까?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어떤 내용들인지 보다 깊이 알려면 먼저 신명기가 어떤 성경인지를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이집트)에서의 긴 노예생활 속에서 극적으로 빠져 나온다.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민족 대 이동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되고, 40년의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가나안 땅의 입구에 도착한다. 40년 동안이나 마음 속에 품어 왔던 희망과 기대가 드디어 그들의 눈 앞에 현실로서 펼쳐진 엄청난 사건이다. 그 약속의 땅, 희망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너무도 말씀하시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이제 곧 그들은 지금까지 척박한 광야에서 살아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셔야만 했던 말씀들, 바로 그것이 신명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들이 지나온 광야와 같은 불모지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문화와 종교였다. 먼저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종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이집트)에서 나온지 40년이 지나긴 했지만, 그 곳에서 살았던 시간이 훨씬 길다. 외국으로 이민간 교포를 생각해 보자. 그들의 2세를 보면 한국문화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문화가 혼합된 형태를 보여준다. 3세를 보면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 거기에서 한 세대 더 내려가서 4세를 보자. 그들은 이미 뼈 속까지 그 나라의 문화가 배어 있는 그 나라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미 뼈 속까지 애굽인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태양, 강과 같은 자연을 신으로 섬기며 심지어 짐승이나 곤충들 까지도 신으로 섬기던 그들의 종교적 가치관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자세히 알려주셔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이 들어가야 하는 가나안 땅의 민속 종교와 문화는 매우 처참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을 위한 제사는 음란의 수준을 넘어선 입에 담기 힘든 그런 모습이었다. 여사제 들은 집단 성 행위를 위해 존재 했었고, 자신들의 신에게 바쳐지는 제사의 최고 정점에서 광적인 집단 성 행위가 자행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가치관으로 형성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민족이 교제하기 시작한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 다는 것이 무엇인지, 즉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선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세히 알려주시길 원하셨다. 또한, 애굽이나 가나안의 신을 섬기는 추악한 모습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도 알려 주시길 원하셨다. 바로 이것이 신명기의 내용이며 목적이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찌니라’. (신명기 22장 4절)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특별히 잘 알 수 있는 것이 22장 4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단순히 이웃을 도우라고 말씀하신 것에 머물지 않으시고 이해하기 쉽도록 아주 명확한 예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작고 사소한 일일 지라도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도우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도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반드시”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던 도중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어르신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분을 돕던지, 돕지 않고 그냥 지나가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성경은 ‘반드시’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것이 단순히 “행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이런 “도움”은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도우라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 중심, 마음으로 도우라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실제로 몸을 움직여 돕는 것이다.